2008년 08월 18일
구세계와 신세계의 중간적인 맛?

정말로 '신의 물방울' 스러운 닭살스런 멘트,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와인은 방사선을 쬐어 숙성을 촉진시켰을 뿐인 싸구려 와인이었다... 이런저런 패러디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스펀지' 에서의 이 장면. 많은 사람들은 당시 테이스팅을 했던 허혁구 소믈리에를 비웃으며 '전문가도 와인 맛을 잘 모른다' 라든가 '쓸데 없이 휘황찬란한 문장만 쓰지 실속은 없다' 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허혁구 소믈리에의 표현과 느낌은 사실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꽤 날카롭다고 해도 될 것이다.
우선 '신세계와 구세계의 중간적인 맛' 이라는 표현에서, '신세계' 와 '구세계' 는 단순히 추상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구세계는 오래 전부터 와인을 제조해 온, 대략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럽 지방 - 이를테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에 반해 신세계는 길어봤자 200년 안팤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 캐나다,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등의 신흥 와인 생산 국가를 일컫는다. 따라서 '구세계와 신세계의 중간적인 맛' 이란 구세계 와인에도 신세계 와인에도 해당되지 않는 특이한 (어찌 보면 어중간한) 맛이라는 의미다.
'이베리아 반도의 탱고의 여인' 이란 표현은 어떨까.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대륙 서남쪽 끝에 있는 반도다. 이에 반해 탱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20세기 초에 확립된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사교적 음악 / 춤이다. 각각 구세계와 신세계를 대표하는 셈.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탱고를 추는 여인' 이란 이질적이고 모순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처음 보았음에도 낮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특이하고 좀 생뚱맞지만 기본적인 맛은 괜찮았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방사선을 통해 인공적으로 맛을 좋게 만든 와인을 비교적 정확히 간파한 셈이다.
하지만 와인 (+ α) 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은 이상 이러한 멘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긴 쉽지 않다. 좀 더 쉽고 직관적인 말로 풀어 쓸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일반적인 소믈리에들은 저런 식의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아마 스펀지 제작진이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그에게 화려한 표현과 수식을 써 달라는 주문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 by | 2008/08/18 14:27 | MokaPot Meltdown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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